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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성취

밤이 아닌 벌건 대낮에 바닥에 한번 벌렁 드러누워 보는 게 소원이었다. 세수 까먹은 얼굴에 눈곱이 달리면 어떻고 빗질 안 한들 어떠랴 잠옷 차림이면 더 좋겠다고... 억수로 재수 좋은 날 집안 한편에 빛이 드러누운 자리를 내 등짝이 차지하게 되었네. 창문이 그토록 넓고 높은 집이 내 집이라는 사실을 기분 좋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늘씬한 나무 끄트머리에는 기다리고 있었다며 바다 빛 하늘이 얼굴을 내밀어 준다. 오르고 싶은 산이 가고 싶은 바다가 바로 내 곁에 있다. 늘어진 손가락 끝에 책 한 권 닿으니 꿈과 현실이 하나 된 날. - 이귀옥 - - Wish fulfillment - My wish was to lie down on the floor in broad daylight instead of at ni..

기본폴더 2022.07.26

빨래판

신나게 돌아가던 세탁기에서 전에 들어보지 못한 괴음이 나기 시작했다. 10년 훌쩍 넘기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에 놀라 일단 중단을 했다. 통 안에 든 옷가지들을 끄집어내려고 하니 비누 물에 담긴 탓인지 꽤 무거운 데다 하나씩 들어 내놓고 보니 생각보다 엄청난 양이다. 일일이 손으로 헹궈내다 보니 그동안 우리 생활에서 세탁기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와 그 공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고장이 난 건지 망가진 건지를 확인해줄 수리공이 올 때까지 그 누구가 아닌 내가 손빨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아 두었다가 자동차로 낯선 동네 Laundromat에 가서 한꺼번에 빨면 된다고 생각하는 남편과의 논쟁은 무모할 뿐 " 그래 이빨 없으니 잇몸으로....."라는 결심으로 매일 손빨래를 시작했다..

기본폴더 2022.07.20

나비 밥그릇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아한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 날에 가죽을 품고 이웃들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의 '구부러진 길 ') 여름이 무르익기 시작하면 떠올리는 시다. 특히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여태껏..

기본폴더 2022.07.13

두 여자

평소 그냥 스쳐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최근에 들어 유난스럽게 내 시선을 붙잡는 액자 사진 그 속에는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세 여자의 어깨가 나란히 하고 있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상큼했던 25년 전 행사 오프닝 모습이다. Penn 대학 별관에서: 왼쪽부터 Siani Lee, 나 그리고 최임자 하지만 지금은 내 양 옆의 두 여자는 한 사람씩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망자 (亡者)가 되었다는 사실에 덧없는 우리네 인생이라는 허무한 생각이 마음 안을 휘젓는다. 지난 6월 22일 펜 아시안 노인복지원 최임자 설립자의 사망 소식은 그의 열정을 기억하는 한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아직도 이른 나이에... *2022년 6월 22일 별세 사실 나와는 개인적인 친분보다는 같은 이민 초기 세대로서 주로 공적인 모임이..

기본폴더 2022.07.05

너를 만나...

어느 날 하늘이 내게로 다가와 숲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 바로 너 때문이야 엉켜지고 흩어져 있던 마음들을 모아 경이로운 곳에 내려다 놓을 수 있는 것도 바로 너의 힘 때문이야 혼란과 고통의 허물을 훌쩍 던져버리고 새 마음을 짓는 용기 또한 바로 너 때문이야 들숨 날숨 중에 무아지경 (無我之境)에 이르고 무릉도원 (武陵桃源)에 든 착각도 너 때문이야 어지러운 세상과 휴전 休戰 할 수 있는 것도... 나의 영혼이 내 안에서 안도의 숨을 몰아 내쉬는 것도.... 이렇게 내 자리에 서있을 수 있는 것 내가 나 되어가는 것 다 너 (요가)를 만난 탓이야.... 요가는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의미 (Ubiquitous)처럼 우주와 나, 나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 자아실현, 즉 신성하고 절대적인 개개인..

기본폴더 2022.06.28

가족의 힘

펜실베이니아 중부지역에 자리한 Pocono 산맥은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캠핑과 스키 그리고 waterafting 하기 위해 가끔 갔던 휴양지이다. 뜻밖에 딸의 주선으로 Father's Day 기념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마치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 속에 있는 듯 들떠 보기도 했다. ' White Haven'에 자리 잡은 숙소는 아미쉬 건축가가 나무로 깔끔하게 지은 개인 별장이라고 한다. 산사의 청정공기가 집안과 주변에 그대로 내려 안은 듯 빈티지와 조화된 정갈한 분위기는 마음까지 차분하게 해 주니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적절한 곳이라 모두 만족을 했다. 가끔 주변에서 떨어져 생활하는 자식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하는 것이 내게는 그저 희망사항 일뿐이라며 부러워했던 나로서는 ..

기본폴더 2022.06.17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달랑 배낭 하나 짊어지고 나 혼자 집을 쏙 빠져나와 4박 5일간 다른 세상에서 일탈 逸脫 을 결심하게 된 건 바로 친구 S의 초대다. 나 스스로 울타리를 도저히 못 넘는 걸 잘 아는 S는 자기 내외 휴가지로 기꺼이 나를 끄집어내는데 평소 실력을 제대로 발휘 한셈이다. 같은 해 같은 달과 날에 태어났어도 표현이나 행동이 소심하고 예민한 나와는 달리 자기 생각과 행동에 대해 거침없는 S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배짱까지 두둑해 평소 나를 대리 만족시켜주는 찐이다. 휴양지에 먼저 가있던 S가 나를 데리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얼싸안은 순간부터 나의 일탈은 시작이 되었다. 남의 동네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나 불어오는 바람마저 우리 동네와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들이면서까지 여행을 ..

기본폴더 2022.06.09

시침 질 하던 날

요즘처럼 날씨가 화창한 봄 날은 겨울 동안 갇혀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들어내 맑은 바람과 봄 볕으로 표백을 시키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게 한다. 몇 날을 벼르다가 드디어 어저께는 겨울 내내 덮었던 솜이불 홑청을 벗겨내어 하루 종일 햇볕에 널었다가 막대기로 툭툭 미련 없이 겨울을 털어 냈다. 어떤 해는 너무 촘촘하게 시침질된 실밥을 뜯어 내느라 시간이 꽤 걸려 혼이 나기도 했었다. 오래전 시어머님께서 미국으로 옮겨 오시면서 솜이불 두 채를 장만해 오셨을 때 "침대 위에다 웬 솜이불?" 그 옛날 온돌방에서 덮고 자던 빛바랜 양단 이불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솜이불 자체를 거부한 나는 보자기에 싸여있는 솜이불을 옷장 안쪽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고 모른척했다.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무척 서운해하셨던 시어머님 "그 ..

기본폴더 2022.05.24

영혼의 빛

내 영혼의 가장 순수한 지점에서 늘 만나는 당신은 오늘 밤엔 굵은 빗줄기 건너편에 홀로 서 계십니다. 나는 당신의 생각을 온통 껴안고자 흠뻑 젖은 뜨거운 가슴으로 당신의 등 뒤에 매 달립니다. 여기까지 떠 올려놓고 나는 며칠을 앓아야 했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의 강 한가운데서 만나는 당신은 내 속의 어두운 찌꺼기 들을 강물 속으로 흔들어 주시니 거친 생각의 골짜기는 영감으로 차고 넘쳐흐릅니다. 만약 당신께서 어제처럼 영원한 나의 주인으로 남아 주신다면, 나는 당신께서 먼저 돌아가 쉬실 고향 언덕 한쪽 기슭에 지금 불타는 입술로 그때 입맞춤하겠습니다. 이귀옥의 '영혼의 빛 ' 한때는 내게도 영혼의 빛이 있었다. 음악: Rain 시, 사진 /작성 이 슬

기본폴더 2022.05.16

부러운 달

오월은 여기저기에서 "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로 채워지는 달이다. 칠순이 넘자마자 혼자 쓰러져 돌아가신 우리 엄마, "어머니" 하고 부를 때 " 왜?"라는 대답 듣는 이들이 부러운 달이다. 이런 내 맘을 시 몇 줄로 달래 본다. 그대는 기억하는가 지금의 볼품없는 그 마른 가슴이 한 때는 그대의 꿈을 비벼대던 그대 최초의 솜이불이었던 것을 그대는 보고 있는가 삐뚤어진 주름 고랑을 끼고 지나가고 있는 낡은 눈물의 행렬을, 그대는 그대의 두 귀로 듣고 있는가 저 땅속에 묻어둔 한숨의 뿌리를, 인내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만냐야 했었던 고통과 고난의 태산이 몸부림치며 무너지는 저 소리를, 그대는 아는가 그대에게 보내는 사랑의 손짓이 마지막 몰아 내쉬는 호흡과 함께 멈추어지고 난 후에 그대 또한 어두운 골짜기를 혼..

기본폴더 2022.0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