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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요염

10월 첫날부터 계속해서 쏟아져 내리던 비가 그치자마자 그토록 기다리던 색들이 사방에서 물기를 털면서 나타났다. 역시 가을은 시월에 들어서야 제대로 숙성이 되고, 모든 자연 또한 시월 속에서 진하게 채색이 되는 것 같다 대체로 사람들은 가을이 되면 '고독하다' '쓸쓸하다'를 끌어안는다고 하는데 나도 그런다. 시월로 들어서면 진한 것과 정분을 내고 싶어졌다. 커피에다 계피를 듬뿍 넣어 진하게 타 마시고 싶고 꿀을 듬뿍 넣은 홍차를 홀짝이고 싶다. 그리고 혼자 마주한 테이블 위에다 피 보다 더 짙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올려놓고 잔 속에서 찰랑거리는 붉은 가을을 마시고 싶다. 역시 와인은 가을과 궁합이 맞고 와인이 담긴 붉은 잔은 진하고 감미롭다. 이즈음에 John Singer Sargent의 'A Dinne..

기본폴더 2022.10.07

젖은날

아!!! 가을이다 ~~ 가을이 되면 팬데믹 공포에서 해방이 될 것 같아 한국 방문을 계획하고 한국행 비행기 티켓까지 구입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정으로 모든 계획이 취소되고 한국의 가을 속에 있던 나를 다시 끄집어내려고 하니 점점 올 가을이 초조하게 다가온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지고 싶어 마치 비가 올 듯 흐리고 무거운 날 New Hope를 찾았다. 동네 분위기에 걸맞은 풍경들이 각 텐트 안팎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을을 입은 채로 내려와 앉아있는 가을에게 내 마음을 살짝 드러내 보여줬다. 꼭 움켜 안고 있던 하늘이 더 이상 버티지를 못하고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로 설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어찌 잘 아는지... 그런 나를 낭만에 운치에 젖게 해주나 싶어 감격해하는데 기찻길..

기본폴더 2022.09.29

가을지붕 한가족

'우리는 한가족'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뉴저지 체리힐 제일교회 성도들이 Mt Laurel 에 자리 잡은 'Laurel Acres Park'에서 예배와 야유회를 가졌다. 실로 3년 만에 한 지붕 아래 한 성도들이 모였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지어 주신 높고 푸른 맑은 가을 하늘과 바람을 지붕 삼아 자연 속에서 온 성도들이 마음껏 만끽한 가을소풍날 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 가을소풍과 가을 운동회날에 보았던 그 장면들과 오버랩이 되자 다시 동심세계 속으로 살짝 빠지기도 했던 설렘의 연속이던 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명언대로 대식구들에게 '가을소풍'의 기운을 돋아주기 위해 늘 뒤에서 수고하는 손길이 있게 마련이다. 즐거운 식사시간을 끝내고 소화도 시킬 겸 다음 순서인 게임을 위한 준비운동이 시작되었다..

기본폴더 2022.09.20

색의 효과

평소 태양이 솟아오르는 강렬한 장면에 매료가 되던 내가 최근에 들어서는 수평선 너머로 조용히 기울어지는 석양에 대한 목마름이 생겼다. 한국 고유 명절인 추석 날 늦은 오후 평소 말과 생각과 행동이 사통팔달(四通八達)하는 여인 셋 파란하늘과 청색바다 그리고 적당히 펼쳐주는 하얀 파도랑 소곤소곤대는 하얀 뭉게구름으로 나섰다. *그리이스인 조르바 장면 구월 바다는 우리에게 가슴을 내밀고 부드러운 바람은 우리를 파도 위에 올려다 놓고 간지럼을 태운다. 바다는 언제나 나를 포함하길래 그냥 그 위를 걸어가도 될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여기서 태초에 창조의 실험이 있었으리라는 당신의 언질을 기억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바다를 그리워하나 - 바다에서- 중에서 (최병무) 바다를 바라보다가 바다를 잃어버렸습니다. 바닷가를 거..

기본폴더 2022.09.14

구월의 맛

한창 아이들과 생업을 위해 치열하게 살던 그 당시에 맞이하던 연휴나 홀리데이와는 달리 이렇게 은퇴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연휴나 홀리데이에 어디로 떠나는 걸 양보하게 되었다. 구태여 인파가 붐비는 연휴에 은퇴한 우리까지 나서는 것보다 아직도 생업에 종사하고 있거나 집에 아이들이 남아있는 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리와 공간을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느긋한 마음 차림도 막상 이웃이 다 빠져나간 듯 동네가 조용하다 싶으니 잠시 남의 동네 바람을 한번 입고 싶다는 생각에서 길을 나섰다.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Bali'c Winery에 들어서니 눈앞에 질서 정열 하게 펼쳐진 포도나무들 가지가지마다 달려있는 포도송이 알맹이들끼리 살랑대는 바람에 흔들리며 뺨을 비벼대고 있다. 문득..

기본폴더 2022.09.07

八字所關

내 바로 위 언니는 태어나자 '보배'라는 신분을 얻었다. 3년 후 손자를 기다렸던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자 치밀어 올라오는 분을 참지 못해 '분자'라는 이름을 내게 달아주었다. '분자'라는 신분으로 시작된 나의 성장기는 언제나 영리한 보배 언니에게 아버지 무릎을 빼앗겨야 했고 친지들의 관심과 사랑은 언니의 몫이었다. 3년 후 그렇게 기다리던 남아가 태어나자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 끼인 나는 스스로 돌보기에 너무 어린 나이에 없는 아이나 마찬가지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동네에서 울음소리가 제일 큰 아이가 바로 바로 나였다며 이웃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는 도중에 아버지와 할머니에 이어 큰 오빠까지 사망하고 두 언니들마저 도시로 떠난 집안 분위기는 화재로 그슬린 벽처럼 암울했다. 졸지에 ..

기본폴더 2022.08.30

착각해도 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 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나 복효근의 : -토란잎에 궁근 물방울 같이는 - 이런 이쁜 시를 읽고 나면 토란잎 배꼽 펴놓고 궁글 궁글 오수를 즐기며 내가 물방울 인양 흔들리며 요염을 떠는 착각을 한다. 내 배꼽이 간지럽다고 웃어도 되나.... 음악: 여름날의 추억 / Le Temps D'un Ete 글, 사진/ 옮김 이 슬

기본폴더 2022.08.17

보리밥

보리쌀 씻는 물에 구름을 담아 쓱쓱 씻어댄다 희디 희게 일어서는 뭉게구름, 보리쌀 뜨물이 은하수를 만든다. 질박하게 놓이는 댓돌 딛고 앉아 재진 보리밥 찬물에 말아 한 숟갈 입에 넣으니 청보리, 엄동을 뚫고 살아오는 듯 오소소 퍼지는 겨울 냄새 댄 여름, 무딘 뱃속에 시원한 궁전을 짓는구나 박종영의 보리밥 이 詩 한 단어 한 구절을 따라서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나는 아득한 옛날 그 우물가에 도착한다. 한 여름 열기가 대지로 내려앉기 시작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물가에 모여 보리쌀을 씻고 헹구곤 하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 올리게 된다. 생각났다 손가락 마디 힘으로 힘껏 문질러진 보리쌀 뜨물끼리 하얗게 몽글거리다 우물가 바닥에 드러누워 뭉게구름 흉내를 훔치던 기억... 그 당시 보리밥에 비하면 지금의 ..

기본폴더 2022.08.09

몰표

이번에도 엄지손가락으로 맨 끝에서 위로 주욱 밀어내어 다시 아래서부터 끝까지 돌돌 말아 올려 꽉 짜낸다. 여러 차례 그렇게 해서 쓰고 나면 가위가 등장한다. 납작한 튜브를 해부하듯 가로세로 가위질로 벌려놓고는 칫솔로 빡빡 긁어내고 나야 미련 없이 쓰레기 통으로 버려지게 된다. 대부분의 가정처럼 다 쓴 샴푸나 세정제를 버리기 전에 빈 통에 물을 넣어 흔들어서 몇 번 더 사용하듯이 얼굴에 바르는 스킨 제품도 버리기 전에 옆으로 눕혀놓고 쓰다가 다시 거꾸로 세워놓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챙기는 게 일상적인 내 수순의 버릇이다. 그게 일반 주부들의 집단 습관이라면 나의 치약 자르기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면 별 짓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보는 사람의 시각과 개념에 따라 '알뜰'도 도가 넘으면 '궁상' 떠는 것으로..

기본폴더 2022.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