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폴더 283

빨래판

신나게 돌아가던 세탁기에서 전에 들어보지 못한 괴음이 나기 시작했다. 10년 훌쩍 넘기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에 놀라 일단 중단을 했다. 통 안에 든 옷가지들을 끄집어내려고 하니 비누 물에 담긴 탓인지 꽤 무거운 데다 하나씩 들어 내놓고 보니 생각보다 엄청난 양이다. 일일이 손으로 헹궈내다 보니 그동안 우리 생활에서 세탁기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와 그 공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고장이 난 건지 망가진 건지를 확인해줄 수리공이 올 때까지 그 누구가 아닌 내가 손빨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아 두었다가 자동차로 낯선 동네 Laundromat에 가서 한꺼번에 빨면 된다고 생각하는 남편과의 논쟁은 무모할 뿐 " 그래 이빨 없으니 잇몸으로....."라는 결심으로 매일 손빨래를 시작했다..

기본폴더 2022.07.20

나비 밥그릇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아한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 날에 가죽을 품고 이웃들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의 '구부러진 길 ') 여름이 무르익기 시작하면 떠올리는 시다. 특히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여태껏..

기본폴더 2022.07.13

두 여자

평소 그냥 스쳐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최근에 들어 유난스럽게 내 시선을 붙잡는 액자 사진 그 속에는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세 여자의 어깨가 나란히 하고 있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상큼했던 25년 전 행사 오프닝 모습이다. Penn 대학 별관에서: 왼쪽부터 Siani Lee, 나 그리고 최임자 하지만 지금은 내 양 옆의 두 여자는 한 사람씩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망자 (亡者)가 되었다는 사실에 덧없는 우리네 인생이라는 허무한 생각이 마음 안을 휘젓는다. 지난 6월 22일 펜 아시안 노인복지원 최임자 설립자의 사망 소식은 그의 열정을 기억하는 한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아직도 이른 나이에... *2022년 6월 22일 별세 사실 나와는 개인적인 친분보다는 같은 이민 초기 세대로서 주로 공적인 모임이..

기본폴더 2022.07.05

가족의 힘

펜실베이니아 중부지역에 자리한 Pocono 산맥은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캠핑과 스키 그리고 waterafting 하기 위해 가끔 갔던 휴양지이다. 뜻밖에 딸의 주선으로 Father's Day 기념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마치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 속에 있는 듯 들떠 보기도 했다. ' White Haven'에 자리 잡은 숙소는 아미쉬 건축가가 나무로 깔끔하게 지은 개인 별장이라고 한다. 산사의 청정공기가 집안과 주변에 그대로 내려 안은 듯 빈티지와 조화된 정갈한 분위기는 마음까지 차분하게 해 주니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적절한 곳이라 모두 만족을 했다. 가끔 주변에서 떨어져 생활하는 자식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하는 것이 내게는 그저 희망사항 일뿐이라며 부러워했던 나로서는 ..

기본폴더 2022.06.17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달랑 배낭 하나 짊어지고 나 혼자 집을 쏙 빠져나와 4박 5일간 다른 세상에서 일탈 逸脫 을 결심하게 된 건 바로 친구 S의 초대다. 나 스스로 울타리를 도저히 못 넘는 걸 잘 아는 S는 자기 내외 휴가지로 기꺼이 나를 끄집어내는데 평소 실력을 제대로 발휘 한셈이다. 같은 해 같은 달과 날에 태어났어도 표현이나 행동이 소심하고 예민한 나와는 달리 자기 생각과 행동에 대해 거침없는 S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배짱까지 두둑해 평소 나를 대리 만족시켜주는 찐이다. 휴양지에 먼저 가있던 S가 나를 데리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얼싸안은 순간부터 나의 일탈은 시작이 되었다. 남의 동네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나 불어오는 바람마저 우리 동네와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들이면서까지 여행을 ..

기본폴더 2022.06.09

시침 질 하던 날

요즘처럼 날씨가 화창한 봄 날은 겨울 동안 갇혀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들어내 맑은 바람과 봄 볕으로 표백을 시키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게 한다. 몇 날을 벼르다가 드디어 어저께는 겨울 내내 덮었던 솜이불 홑청을 벗겨내어 하루 종일 햇볕에 널었다가 막대기로 툭툭 미련 없이 겨울을 털어 냈다. 어떤 해는 너무 촘촘하게 시침질된 실밥을 뜯어 내느라 시간이 꽤 걸려 혼이 나기도 했었다. 오래전 시어머님께서 미국으로 옮겨 오시면서 솜이불 두 채를 장만해 오셨을 때 "침대 위에다 웬 솜이불?" 그 옛날 온돌방에서 덮고 자던 빛바랜 양단 이불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솜이불 자체를 거부한 나는 보자기에 싸여있는 솜이불을 옷장 안쪽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고 모른척했다.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무척 서운해하셨던 시어머님 "그 ..

기본폴더 2022.05.24

영혼의 빛

내 영혼의 가장 순수한 지점에서 늘 만나는 당신은 오늘 밤엔 굵은 빗줄기 건너편에 홀로 서 계십니다. 나는 당신의 생각을 온통 껴안고자 흠뻑 젖은 뜨거운 가슴으로 당신의 등 뒤에 매 달립니다. 여기까지 떠 올려놓고 나는 며칠을 앓아야 했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의 강 한가운데서 만나는 당신은 내 속의 어두운 찌꺼기 들을 강물 속으로 흔들어 주시니 거친 생각의 골짜기는 영감으로 차고 넘쳐흐릅니다. 만약 당신께서 어제처럼 영원한 나의 주인으로 남아 주신다면, 나는 당신께서 먼저 돌아가 쉬실 고향 언덕 한쪽 기슭에 지금 불타는 입술로 그때 입맞춤하겠습니다. 이귀옥의 '영혼의 빛 ' 한때는 내게도 영혼의 빛이 있었다. 음악: Rain 시, 사진 /작성 이 슬

기본폴더 2022.05.16

부러운 달

오월은 여기저기에서 "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로 채워지는 달이다. 칠순이 넘자마자 혼자 쓰러져 돌아가신 우리 엄마, "어머니" 하고 부를 때 " 왜?"라는 대답 듣는 이들이 부러운 달이다. 이런 내 맘을 시 몇 줄로 달래 본다. 그대는 기억하는가 지금의 볼품없는 그 마른 가슴이 한 때는 그대의 꿈을 비벼대던 그대 최초의 솜이불이었던 것을 그대는 보고 있는가 삐뚤어진 주름 고랑을 끼고 지나가고 있는 낡은 눈물의 행렬을, 그대는 그대의 두 귀로 듣고 있는가 저 땅속에 묻어둔 한숨의 뿌리를, 인내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만냐야 했었던 고통과 고난의 태산이 몸부림치며 무너지는 저 소리를, 그대는 아는가 그대에게 보내는 사랑의 손짓이 마지막 몰아 내쉬는 호흡과 함께 멈추어지고 난 후에 그대 또한 어두운 골짜기를 혼..

기본폴더 2022.05.08

잔치 날

필라델피아 한인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가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의 염원이었던 영사관 출장소 유치 완성 기념(2021)과 함께 -Korea In Philly - 란 타이틀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한 Blue Bell에 있는 Motgomery Community College에서 개최했다. 한국 전통문화와 예술 그리고 음식 등 지역 주민들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하는 취지에 맞게 축제다운 분위기에서 성황리에 치렀다. 개인적으로는 한인회 초기 당시에 이사로 그리고 한인회 산하기관인 장학재단 초대 위원장으로 직, 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기에 이번 50주년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전통 녹차 다례식을 시연하게 될 천세련 작가를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화가와 작가 그리고 전시기획대표..

기본폴더 2022.05.04

나도 털리다

닫혀 있던 것, 포개져 있던 것, 그리고 감춰 놓았던 조차 훌훌 털리는 계절이다.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만드는 이 계절에 풀어놓고 싶은 시를 모셨다. 내 그대를 한여름 날에 비할 수 있을까? 그대는 여름보다 더 아름답고 부드러워라. 거친 바람이 5월의 고운 꽃봉오리를 흔들고 여름의 빌려온 기간은 너무 짧아라. 때로 태양은 너무 뜨겁게 내리쬐고 그의 금빛 얼굴은 흐려지기도 하여라. 어떤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쇠퇴하고 우연이나 자연의 변화로 고운 치장을 빼앗긴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 그대가 지닌 미는 잃어지지 않으리라. 죽음도 자랑스레 그대를 그늘의 지하세계로 끌어들여 방황하게 하지 못하리. 불멸의 시구 형태로 시간 속에서 자라게 되나니. 인간이 살아 숨을 쉬고 볼 수..

기본폴더 2022.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