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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침 질 하던 날

큐팁 2022. 5. 24. 21:48

 

요즘처럼 날씨가 화창한 봄 날은

겨울 동안 갇혀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들어내

맑은 바람과 봄 볕으로 표백을 시키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게 한다.

 

 

 

몇 날을 벼르다가 드디어 어저께는

겨울 내내 덮었던 솜이불 홑청을 벗겨내어

하루 종일 햇볕에 널었다가 막대기로 툭툭 미련 없이 겨울을 털어 냈다.

 

어떤 해는

너무 촘촘하게 시침질된 실밥을 뜯어 내느라

시간이 꽤 걸려 혼이 나기도 했었다. 

 

오래전

시어머님께서 미국으로 옮겨 오시면서 솜이불 두 채를 장만해 오셨을 때

"침대 위에다 웬 솜이불?"

그 옛날 온돌방에서 덮고 자던 빛바랜 양단 이불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솜이불 자체를 거부한 나는

보자기에 싸여있는 솜이불을 옷장 안쪽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고 모른척했다.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무척 서운해하셨던 시어머님

"그 이불이 그냥 이불이 아니다 비싼 명지 솜으로 유명한 집에 맡겨서 끼운 솜이불인데

찬바람 불면 솜이불만큼 따스한 게 없지.."

거금을 투자하신 사실을 내 양심에다 대고 설득하기 시작하셨다.

 

집안에 찬바람이 채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자

시어머님은 우리 안방에다 기어코 솜이불을 밀어 놓으셨다.

 

 

 

그때부터 매해 화창한 봄날이 되면

 솜이불 홑청과 속통을 분리하는 것이 시어머님의 중요 연례행사가 되었다.

 

실밥을 뜯어낸 속통을 밖에다 널어놓고 막대기로 묵은 먼지를 털고

얼룩진 홑청은 깨끗이 빨아 손질을 다 끝내시고 나면 

늘 바쁜 척하는 며느리 눈치를 살피신다.

 

겨우 날이 잡히면

넓은 자리에 펼쳐진 이불 홑청 속으로 명지 솜을 편편하게 집어넣기 위해

시어머님과 마주 앉아 이불을 들었다 놨다 또 간간히 흔들기도 하다 보면

모서리를 서로 잡아당기다 엎어지기도 했다.

 

모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집안을 채우기도 했다.

 

내 키보다 더 길게 끼워놓은 실이 바늘 기장보다 짧게 되면

 다시 바늘귀에다 실을 끼우는 일이 내 담당이었다.

 

그럴 때마다 잠시 허리를 길게 펴시던 시어머님은

단번에 실을 끼워 넣는 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시도  하셨다.

 

 

 

고풍스러운 무늬를 새기듯

골무 낀 손가락으로 이불깃을 돌아가며

한 땀 한 땀 꿰다 보면 어느덧 이불 한 채가 완성이 됐다.

 

 솜이불 네 모퉁이를 돌아가며 시침질을 하다 보면

평소에 나누지 않는 살가운 대화를 명지 솜에다 심어가며

고부간의 정분을 쌓기도 했다.

 

시부모님께서 가까운 노인 아파트로 이사를 하시던 해

 매번 이불 홑청을 벗겨내고 다시 시침질하는 번거로움과 촌티에서 벗어나고자

솜이불을 보자기에 구겨 넣듯 옷장 구석에 밀어 넣었다.

마치

시부모님이 안 계시면 겨울도 오지 않을 것처럼...

 

그런데

둘밖에 없는 집안으로 서서히 찬 공기의 침입이 시작하자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솜이불 보자기를 풀고 말았다.

"뭐니 뭐니 해도 추운 밤엔 솜이불이 최고지"

마침내 시어머님의 주장에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시어머님 세상에 안 계시니

혼자 솜이불을 벗기고 끼우기를 몇 년째 하고 있다.

 

 

 

시어머님의 부러운 눈총을 받으며

단번에 바늘귀에다 실을 잘 집어넣던 나도

이제는 한쪽 눈을 찡그려도 단번에는 힘든다.

 

화창한 봄,

봄바람이 잔뜩 든 이불 속통과 홑청을 펼쳐 놓고 보니

어쩐지 집안이 허기진 것 같이 '공' 하다.

 

그러고 보니

이불 모서리 맞잡고 웃어 줄 시어머니도

바늘귀에 실을 끼워줄 딸아이도 내 옆에 없는데

오롯이

추억만 저축된 솜이불 홑청 위로 성큼 드러누운 햇살이 오수(午睡) 즐긴다.

 

*이 글은

2006년 5월에  '미주 동아일보' 측의 요청에 의해

두 차례 실렸던 글이다.

 

 

 

 

음악: Chaconne/ Secret Garden

글, 사진(pinterst)/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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