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87

착각해도 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 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나 복효근의 : -토란잎에 궁근 물방울 같이는 - 이런 이쁜 시를 읽고 나면 토란잎 배꼽 펴놓고 궁글 궁글 오수를 즐기며 내가 물방울 인양 흔들리며 요염을 떠는 착각을 한다. 내 배꼽이 간지럽다고 웃어도 되나.... 음악: 여름날의 추억 / Le Temps D'un Ete 글, 사진/ 옮김 이 슬

기본폴더 2022.08.17

보리밥

보리쌀 씻는 물에 구름을 담아 쓱쓱 씻어댄다 희디 희게 일어서는 뭉게구름, 보리쌀 뜨물이 은하수를 만든다. 질박하게 놓이는 댓돌 딛고 앉아 재진 보리밥 찬물에 말아 한 숟갈 입에 넣으니 청보리, 엄동을 뚫고 살아오는 듯 오소소 퍼지는 겨울 냄새 댄 여름, 무딘 뱃속에 시원한 궁전을 짓는구나 박종영의 보리밥 이 詩 한 단어 한 구절을 따라서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나는 아득한 옛날 그 우물가에 도착한다. 한 여름 열기가 대지로 내려앉기 시작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물가에 모여 보리쌀을 씻고 헹구곤 하던 모습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 올리게 된다. 생각났다 손가락 마디 힘으로 힘껏 문질러진 보리쌀 뜨물끼리 하얗게 몽글거리다 우물가 바닥에 드러누워 뭉게구름 흉내를 훔치던 기억... 그 당시 보리밥에 비하면 지금의 ..

기본폴더 2022.08.09

몰표

이번에도 엄지손가락으로 맨 끝에서 위로 주욱 밀어내어 다시 아래서부터 끝까지 돌돌 말아 올려 꽉 짜낸다. 여러 차례 그렇게 해서 쓰고 나면 가위가 등장한다. 납작한 튜브를 해부하듯 가로세로 가위질로 벌려놓고는 칫솔로 빡빡 긁어내고 나야 미련 없이 쓰레기 통으로 버려지게 된다. 대부분의 가정처럼 다 쓴 샴푸나 세정제를 버리기 전에 빈 통에 물을 넣어 흔들어서 몇 번 더 사용하듯이 얼굴에 바르는 스킨 제품도 버리기 전에 옆으로 눕혀놓고 쓰다가 다시 거꾸로 세워놓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챙기는 게 일상적인 내 수순의 버릇이다. 그게 일반 주부들의 집단 습관이라면 나의 치약 자르기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면 별 짓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보는 사람의 시각과 개념에 따라 '알뜰'도 도가 넘으면 '궁상' 떠는 것으로..

기본폴더 2022.08.02

소원성취

밤이 아닌 벌건 대낮에 바닥에 한번 벌렁 드러누워 보는 게 소원이었다. 세수 까먹은 얼굴에 눈곱이 달리면 어떻고 빗질 안 한들 어떠랴 잠옷 차림이면 더 좋겠다고... 억수로 재수 좋은 날 집안 한편에 빛이 드러누운 자리를 내 등짝이 차지하게 되었네. 창문이 그토록 넓고 높은 집이 내 집이라는 사실을 기분 좋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늘씬한 나무 끄트머리에는 기다리고 있었다며 바다 빛 하늘이 얼굴을 내밀어 준다. 오르고 싶은 산이 가고 싶은 바다가 바로 내 곁에 있다. 늘어진 손가락 끝에 책 한 권 닿으니 꿈과 현실이 하나 된 날. - 이귀옥 - - Wish fulfillment - My wish was to lie down on the floor in broad daylight instead of at ni..

기본폴더 2022.07.26

빨래판

신나게 돌아가던 세탁기에서 전에 들어보지 못한 괴음이 나기 시작했다. 10년 훌쩍 넘기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에 놀라 일단 중단을 했다. 통 안에 든 옷가지들을 끄집어내려고 하니 비누 물에 담긴 탓인지 꽤 무거운 데다 하나씩 들어 내놓고 보니 생각보다 엄청난 양이다. 일일이 손으로 헹궈내다 보니 그동안 우리 생활에서 세탁기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지와 그 공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고장이 난 건지 망가진 건지를 확인해줄 수리공이 올 때까지 그 누구가 아닌 내가 손빨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아 두었다가 자동차로 낯선 동네 Laundromat에 가서 한꺼번에 빨면 된다고 생각하는 남편과의 논쟁은 무모할 뿐 " 그래 이빨 없으니 잇몸으로....."라는 결심으로 매일 손빨래를 시작했다..

기본폴더 2022.07.20

나비 밥그릇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아한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 날에 가죽을 품고 이웃들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의 '구부러진 길 ') 여름이 무르익기 시작하면 떠올리는 시다. 특히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여태껏..

기본폴더 2022.07.13

두 여자

평소 그냥 스쳐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최근에 들어 유난스럽게 내 시선을 붙잡는 액자 사진 그 속에는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세 여자의 어깨가 나란히 하고 있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상큼했던 25년 전 행사 오프닝 모습이다. Penn 대학 별관에서: 왼쪽부터 Siani Lee, 나 그리고 최임자 하지만 지금은 내 양 옆의 두 여자는 한 사람씩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망자 (亡者)가 되었다는 사실에 덧없는 우리네 인생이라는 허무한 생각이 마음 안을 휘젓는다. 지난 6월 22일 펜 아시안 노인복지원 최임자 설립자의 사망 소식은 그의 열정을 기억하는 한인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아직도 이른 나이에... *2022년 6월 22일 별세 사실 나와는 개인적인 친분보다는 같은 이민 초기 세대로서 주로 공적인 모임이..

기본폴더 2022.07.05

가족의 힘

펜실베이니아 중부지역에 자리한 Pocono 산맥은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캠핑과 스키 그리고 waterafting 하기 위해 가끔 갔던 휴양지이다. 뜻밖에 딸의 주선으로 Father's Day 기념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마치 거꾸로 돌아가는 시간 속에 있는 듯 들떠 보기도 했다. ' White Haven'에 자리 잡은 숙소는 아미쉬 건축가가 나무로 깔끔하게 지은 개인 별장이라고 한다. 산사의 청정공기가 집안과 주변에 그대로 내려 안은 듯 빈티지와 조화된 정갈한 분위기는 마음까지 차분하게 해 주니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적절한 곳이라 모두 만족을 했다. 가끔 주변에서 떨어져 생활하는 자식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하는 것이 내게는 그저 희망사항 일뿐이라며 부러워했던 나로서는 ..

기본폴더 2022.06.17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달랑 배낭 하나 짊어지고 나 혼자 집을 쏙 빠져나와 4박 5일간 다른 세상에서 일탈 逸脫 을 결심하게 된 건 바로 친구 S의 초대다. 나 스스로 울타리를 도저히 못 넘는 걸 잘 아는 S는 자기 내외 휴가지로 기꺼이 나를 끄집어내는데 평소 실력을 제대로 발휘 한셈이다. 같은 해 같은 달과 날에 태어났어도 표현이나 행동이 소심하고 예민한 나와는 달리 자기 생각과 행동에 대해 거침없는 S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배짱까지 두둑해 평소 나를 대리 만족시켜주는 찐이다. 휴양지에 먼저 가있던 S가 나를 데리러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얼싸안은 순간부터 나의 일탈은 시작이 되었다. 남의 동네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나 불어오는 바람마저 우리 동네와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과 돈을 들이면서까지 여행을 ..

기본폴더 2022.06.09

시침 질 하던 날

요즘처럼 날씨가 화창한 봄 날은 겨울 동안 갇혀있는 것들을 바깥으로 들어내 맑은 바람과 봄 볕으로 표백을 시키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게 한다. 몇 날을 벼르다가 드디어 어저께는 겨울 내내 덮었던 솜이불 홑청을 벗겨내어 하루 종일 햇볕에 널었다가 막대기로 툭툭 미련 없이 겨울을 털어 냈다. 어떤 해는 너무 촘촘하게 시침질된 실밥을 뜯어 내느라 시간이 꽤 걸려 혼이 나기도 했었다. 오래전 시어머님께서 미국으로 옮겨 오시면서 솜이불 두 채를 장만해 오셨을 때 "침대 위에다 웬 솜이불?" 그 옛날 온돌방에서 덮고 자던 빛바랜 양단 이불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솜이불 자체를 거부한 나는 보자기에 싸여있는 솜이불을 옷장 안쪽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고 모른척했다.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무척 서운해하셨던 시어머님 "그 ..

기본폴더 2022.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