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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사전

큐팁 2023. 10. 13. 12:22

1973년 10월 23일

내가 미국 땅에 첫 발을 디뎠던 날이다.

 

어느새 오십 년의 세월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때는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겨 왔던 물건들도 하나둘씩 버려지거나 사라지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바로 논노 스타킹과 이 낡은 ‘한영사전’ 

 

 

 

전체

735페이지에 내 엄지와 검지에 딱히 잡히는 크기의 이 사전은

내 이민 역사의 길잡이 이자 바로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서랍 속에 넣어두고 옛 생각이 들 때마다 들여다보지만

초창기 때는

한 시도 내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던 아주 소중한 물건이었다.

 

 

 

낯설고

말 설은 땅에다 뿌리를 통째로 심으려 할 그 당시는

내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한국어로써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벙어리요 귀머거리 처지에 장님신세나 다를 바 없었던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처지였다.

 

돈이 없으면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 생활에 고통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

불안함과 외로움에 심지어 소외감까지 겹치게 되어

정신적으로 고립상태가 되는 것은 이민 와 사는 사람들은 다 겪는 일이다.

 

일부러

휴대하기 좋은 포켙용 한영사전을 준비해 온 이유도 언제 어디에서든

답답한 입장에 처해있을 때 손쉽게 펴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연고로

수시로 걸려드는 궁금한 것, 이해 못 하는 것

그리고

서류를 이해하고 작성해야 할 때마다 바로 내 한영사전이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주곤 했다.

 

한 번은

미국회사에 정식으로 일자리를 신청해 놓고 기다리는 동안에

하도 궁금하여 두 번씩 찾아가서 취직여부를 부탁하자

 바로 그자리에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그때가

1976년도였으니 미국이민생활 3년 차였던 때다.

 

 

 

백발에

매우 깐깐해 보이는 백인 슈퍼바이저 할머니는

인터뷰 중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산지 고작 3년,

실제로 미국사회생활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영어 질문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만 분 다행(萬分多幸)으로

가방 속에 든 한영‘사전’이 순간적으로 떠 올라 안도가 된 나는

슈퍼바이저 질문의 스펠링을 한 자 한자 무가내하로 써 달라는 여유까지 보였다.

 

정신없이

사전을 막 넘기며 단어들을 찾아내고 게다가 대답까지 찾아

사전을 보여주는 어처구니 내 행동에 백인 할머니는 뭘 느꼈던지

그날로 바로 취직이 되었다.

 

절박한 처지에

도움이 되어준 사전을 품에 껴안고 감격하던 그 장면은

간간히 심적으로 나체가 되곤 하는 이민생활에 용기와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는 처방전이 되어주기도 한다.

 

 

 

50년의 세월을

함께 걸어오면서 마른침을 발라가며 초조한 손동작으로 열리고 닫히느라

겉장의 여러 군데가 찢어져 나가고 양쪽 깃과 속장이 다 닳아 

안쪽 방향으로 도르르 말려져 바닥에 놓으면 마치 낡은 부채처럼 벌렁 드러눕는다.

 

그나마

낡아 떨어져 나간 페이지들은 풀칠 된채로 제자리를 지키는 시늉을 하고 있다.

 

한때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서점에서 많은 책들을 사들고 왔다.

 

점점

시대의 변천에 따라

 아예 사전이라는 단어마저 사라져가고

영어번역 웹으로 간단히 해결을 하고 있지만

내 손가락을 대기만 하면 찾고자 하는 단어를 척 열어 보여주는

낡은 사전은 내게는 영원한 동반자요 안내자다.

 

마치 길을 나서는 장님이 안내견이 앞장을 서야 안심하는 것처럼

항상 내 가방 안에 소사전이 들어 있었기에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비록

한영사전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내 기억이 아퀴를 짓는다 해도

 ‘한영사전’ 만큼은

내 이민생활의 증거이자 흔적으로 남아주게 될 것으로 믿는다.

 

 

 

 

 

음악: Autumn Rose / Ernest Cortzar

글, 사진/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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