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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공

흔치는 않겠지만 살면서 닮고 싶고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로또에 당첨된 인생이다. 존재를 걸고 연모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인생은 매일이 봄날이다. 외로운 이민생활 시작인 20대에 알게 되어 혼란스러운 결혼생활에 시달렸던 30,40대에 고민을 털어내고 의논할 수 있는 멘토가 내게 있었다는 건 분명 아무나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내 인생 50,60대가 가장 빛나던 때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친밀하게 소통 가능한 멘토가 위기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늘 존경했던 분 늘 신뢰했던 분 늘 친밀했던 분 하지만 언제나 빗줄기 건너에 계셨을 뿐 내 영혼의 순수한 지점에서 만나 깨지고 뒤틀어진 내 인생을 수선 맡아 주신 분 내 평생 할 수 있는 사랑을 다 소진했다 해도 후회하..

기본폴더 2024.01.28

제발 !

처음엔 호기심으로 일일이 열어봤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비밀댓글이 줄줄이 달리기 시작했다. Daum.net으로 옮겨오기 전 미주중앙일보에서 관리하는 J Blog에서 10년간 블로거로 활동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가끔씩 올려진 비밀댓글은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거나 혹 다른 방문객들에게 의심 내지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건네오는 대화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땐 비밀댓글이 달려져 있으면 설레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T story로 바뀌지고 날이 갈수록 광고가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비밀댓글이 줄줄이 사탕처럼 위에서 아래로 좌악 달려든다. 하나같이 진정성 없는 무미건조하게 복사된 상투적인 인사말을 이방 저방에다 같다 붙여놓고 있다. 포스팅 글 내용과는 전혀 다른 댓글 '글 잘쓰네요' ..

기본폴더 2024.01.21

젖은 창

비 같은 눈이 눈 같은 비가 부엌 창 밖으로 흘러내리는 날 ' 눈과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사랑이 시작되는 날이다. 그들의 단상에 나도 젖어 보고 싶어 창너머로 시선을 보낸다. 우산 속의 연인들이 길 위에 마주 보고 서성이듯 젖은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외로운 시선도 있다. 달리던 마음이 비를 닮아서일까 잠시 창가에 걸터 앉는다. 비가 좋아 눈이 좋아 바깥에서 젖는 사람도 있지만 나처럼 창밖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영혼이 팔리는 사람도 있다. 젖은 창 건너에 흐르는 빗물이 내 마음속에도 흐른다. 바깥세상은 비에 젖고 나는 음악에 젖는 날이다. 비가 아무리 줄기차게 쏟아진다 하여도 우산 속에서 나란히 걸을 수 있다면 사랑은 시작된 것입니다 발목과 어깨를 축축이 적셔온다 하여도 비를 의식하기보다 서로의..

기본폴더 2024.01.15

낯설었던 날

하필 하루종일 바람 불고 태양과 숨바꼭질 하던 날 거제시의 섬 칠천도(七川島)에 내가 있었다는 게 너무 낯설었다. 사실 그동안 몇 차례 거제도를 갔었지만 그곳에 칠천도섬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직도 미개발 황토 지역이 많이 남아있고... 덜 붐비기에 그런 칠천도가 좋아 자주 오게 된다는 어느 작가의 안내로 익숙지 않은 낡은 선박장에서 어설픈 피사체가 되어버린 낯설었던 날 그런데 여전히 설명도 이해도 안되는 건 그 앞에 서 있을 땐 마치 무언의 언어 잔치에 초대 받은것 처럼 영혼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날씨랑 전혀 관계없이 바람이랑 데이트하던 낯설었던 날 수야방교 근처에서 나타나지 않는 해 대신 미소를 만났던 그날 낯설기만 하던 날.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조수미 글과..

기본폴더 2024.01.07

긍정의 품격

나보다 먼저 일본 '후쿠오카'를 다녀온 동생 주희로부터 " 후쿠오카에 가면 선영이 언니의 클래식 번역본을 보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 설사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더라도 클래식에 문외한 나로서는 주희의 말이 막연하게 들릴 뿐이었다. 후쿠오카에 도착한 후 나의 일상은 바다와 마을 분위기에 몰입되는 바람에 주희가 언급한 클래식 번역본에 대해 잊고 있다는 걸 나 스스로에게 들켜버린 나는 그때부터 손에 쥔 번역본을 한 장씩 페이지를 급하게 들춰내기 시작했다. 일본어로 된 책을 한국어로 직접 번역을 해서 완성된 두 권의 책 Classic 1 & 2 총 777페이지 무심하게 듣기만 했을 때와는 달리 직접 책이 내 손에 잡혀있을 때는 거의 충격이었다. 전문적인 번역가가 아닌 사촌언니로서 어찌 가능했을까? ..

기본폴더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