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 3

큰아버지의 執事

강가에 사시는 큰 아버님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은 60년대 초반 내가 초등학교 5-6학년 즈음이었다. 그 당시 큰아버지에게는 공무원이 되어 서울로 옮겨간 큰 아들과 서울의대를 졸업한 둘째 아들의 미국 생활이 막 시작했던 때인 걸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고향 동네 중심가인 대로변에서 있었는데 큰아버지는 사람들을 시켜 수시로 나를 찾으셨다. 한참 신나게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불려갈 때는 정말 화가 나고 짜증이 치올라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내 두 발은 어느새 강변 큰집 대문 앞에 당도해 있곤 했었다. 내게 주어진 주 업무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매청에서 들어온 담배를 판매장에서 싣고 오는 일인데 그때마다 내 앞에는 손가락에 닳아빠진 주판이 놓여 있었다. 큰아버지께선 필요한 담배 종류와 ..

기본폴더 2023.02.20

원초적 설렘

한때는 Valentines Day 가 들어있는 2월이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기다려지고 바쁜 달이기도 했었다.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의 그물망에 걸려든 상대에게 선물을 전하는 사랑으로 공기가 충만한 달이다. 일 년 중 발렌타인스 날은 꽃과 쵸코렛을 파는 가게와 더불어 식당이 엄청 붐비는가 하면 우리가 운영했던 보석가게도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매상이 오르는 날이다. 가게를 접은 지도 거의 5년이 된 지금 그런 기대와 설렘임을 가졌다는 사실조차 기억에서 밀쳐져 있는데... 우연히 정여울이라는 작가의 첫사랑에 대한 글을 읽게 되자 누구에게나 한 번쯤 경험한 첫사랑의 쓰고 달달한 그 기분을 떠올리게 된다.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달'이라는 간판을 가슴에 달고 싶은 용기는 어디서 왔을까.... 첫사랑의 대표 증상..

기본폴더 2023.02.12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가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 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기본폴더 2023.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