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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좀 보소

큐팁 2021. 11. 24. 07:56

 

내가 태어나자

손자를 기대를 하셨던 할머니는 원통해서 '분자'라는 이름을 지어놓고

한동안 서운해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 바로 위 언니의 이름이

'보배'라는 이유를 깨닫는 나이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엄마가 첫 딸을 낳고 몇 년후에 첫아들도 낳았지만

그 바로 밑으로 태어난 딸이 생후 얼마 안 되어서 죽게 되자

심기가 불안한 할머니는 손자, 손녀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건강한 아이를 소원하던 중에 태어난 언니에게는

  '보배'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세살터위인 언니와 나는 가족들과 고향 이웃들에게

 보배와 분자로 불리며 성장을 했다.

 

그런데

내가 태어난 걸 그리도 서운하게 여겼던 할머니가

 눈을 감으실 때까지 나는 늘 당신 곁에서

수행비서 노릇까지 하게 하셨다는 게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름 탓인지는 모르나

보배 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재' '천재'로 스포트라잇을 받으며

큰 도시에서 중,고등부 그리고 대학까지 마쳤고

 

반면에

고향에 남게 된 나는

한창 보살핌과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엄마와 막내 남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자리에서

억울한 소녀가장 노릇을 감당 해야만 했다.

 

그러서였을까

어렸을 적에 엄마나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게 되면

 울음소리가 신작로까지 메아리 되어 울렸다는 뒷 이야기는 

때로는 놀림감이 되기도 했으나

나 딴에는 설움과 분노를 그런 식으로 토하면서 

" 억울하면 하루빨리 성장하자 ..." 고 다짐을 했던 것 같다.

 

빠른 세월은 미국에서는 더 빠르게 흘러

 보배 언니는 너무 이른 나이에 하늘나라로 전학을 가고 말았다.

 

신변 상승의 기대감으로 결혼이라는 굴레 속으로 발을 내 디뎠지만

가족은 물론 주변까지 챙겨야 하는 임무 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모든 일의 결과 또한 자연스레 내 책임의 몫이 되곤 했다.

 

하지만

'분자'로 태어난 이유로 '을'이 되어 살아오는 억울한 여정이

책임감과 인내심을 스스로 내재시키는 힘이 되었고

따라서 사회 약자층에 대한 관심에 이어

 세상을 버텨내는 강한 힘이 되어주고 있음에 스스로 대견해할 때마다

억울함이 빠져나간 자리에 당당함으로 채워가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대견하다.

 

 

 

한 여름 내내

우리를 부지런하게 하면서 주요 비타민 공급원 노릇을 해주다

자기 임무를 다한 깻잎과 고추나무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날

토마토 나무도 같이 드러내려고 하니

단 한 번도 익어보지도 못한 푸른 토마토들끼리 

늙은 가지에 조롱조롱 매달려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대로 버려진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싶은 시퍼렇게 질려있는 것들을

측은지심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다

 그 어린 '분자' 생각이 났다.

 

 

 

이왕 방울토마토 신분으로 태어났으니

제 색으로 제 몫을 다하게 해 줘야겠다는 마음을 그릇에 담아

햇빛 아래에다 모셔 놓고 매일 아침 들여다보는게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고맙게도 내 마음을 눈치챈 듯

 토마토들이 늦 가을에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비록 제 가지와는 이별을 했어도

관심과 사랑이

생명수가 된다는 걸 체험하자 벽에도 걸어놓는 만용도 부려본다.

 

 

매일 아침 베란다 여기저기에다 눈 맞춤을 하자

 

 

 

 엉켜있던 분자의 설움마저

늦가을 햇살 재롱에 녹아내린다.

 

" 분자 없소 "

 

 

 

노래: Memories/ 이승열

글, 사진/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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