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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큐팁 2021. 7. 20. 09:15

 

여름이 다가오는 열기를 느끼게 되면 자주 떠 오르는 얼굴 Nancy.

 

그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일 년을 함께 살았던 필리핀계 룸메이트 었다.

 

당시 나는

이민 생활 2년 만에 극적으로 미국 회사에 취직이 되어 방을 구하는 중이었고

낸시는 필라델피아시 브로드가에 있는 Temple 대학병원 간호사였는데

병원 바로 길 건너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던 낸시를 알게 된 것은

바로 같은 병원 간호사인 언니로 통해서였다.

 

일반적으로 살기가 좋은 지역에 자리 잡은 건물일 경우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방 값이 비싸지만 내가 살기로 했던 동네는 그 반대 었다.

 

지금은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신천지로 변했지만

그 당시는 병원을 제외한 주변 건물들은

거의 비어 있는 데다 깨진 창문을 나무판자로 막아놓은 것이

페허지대 특유의  살벌하고 음산한 분위기로 덮혀져 있었다.

 

낸시와 내가 사는 아파트 삼층 꼭대기에서 보이는 것이란

낡은 지붕 위로 너덜거리는 쓰레기와

그 주변을 서성거리는 허기진 고양이의 섬뜩한 눈빛뿐이었다. 

 

이삿짐이래야 옷가지와 신발 그리고 간단한 소지품 정도였지만

하필 그때가 무더운 여름이라

엘리베이터 없이 삼층으로 짐을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동안

몸 안에 남이 있던 수분이 몽땅 고갈되어 나중에는 탈진 증세로 혼이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내가 그렇게 기진맥진을 했던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삼층으로 들어서자마자

양철지붕을 덮고 있는 실내가 찜통 속처럼 푹푹 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이란 창문은 다 내려져 있었다.

 

에어컨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선풍기 정도는 당연히 일을 거로 기대를 했건만  끝내 선풍기는 보이지 않았다.

 

 더운 나라에서 성장해서인지

낸시는 아무렇지 않게 더위와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가구라고는 러시아계 유태인 주인이 제공한

철제 침대 두 개와 거실용 낡은 소파 그리고 냉장고가 전부였고

추가로

건드리기만 하면 금세 바퀴가 달아 날 것 같은

이동식 스탠드 위에 TV 가 기절할 것처럼 얹혀 있었다.

 

그나마 그 TV는 낸시가 직접 구입한 것이라는 사실을

멋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채널을 막 돌리고 있을 때 낸시가 알려줬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로

나는 나의 유일한 소품인 SONY 트랜지스터에서 나오는 음악과 함께

내 가족으로부터 벗어난 자립이 시작되었다. 

 

낸시는 생김새처럼 무뚝뚝하고 뻣뻣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솔직히 처음 아파트로 들어갈 때는 

나보다 먼저 살고 있는 간호사인 낸시의 덕을 보게 될 것으로 은근히 기대를 했듯이

어쩌면

낸시도 여름 철에 이사를 오면서 선풍기 정도는 챙겨서 올 것으로 기대를 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서로의 기대를 벗어난 우리는

한 방에서 잠을 자고 같은 공간에서 지내긴 해도 함께 음식을 먹는다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매달 정확한 렌트비 나눔과

내 것 네 것을  확실하게 분리하고 따지는 일에 촉각을 곧도 세워야 하는

비루한 동업자에 불과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먹고 남은 음식에다 내 이름을 써서 보관을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매주  바뀌는 스케줄에 오버타임까지 하고 들어오는 낸시의 얼굴은

늘 누런 이끼가 끼여 있는 듯 피곤에 절여져 있었다.

 

살벌한 지역에다 그것도 지붕 바로 밑에다 방을 구하는 걸 말리던 지인들에게는

버스나 지하철 타기가 편리한 곳이라고 해명을 했지만

사실 나도 낸시처럼 돈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돈을 모아서 하고 싶은 디자인 공부와 결혼을 하겠다는 내 다짐에 비해

낸시는 필리핀에 있는 가족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낮보다 여름의 밤이 더 답답해서

처음에는 멋모르고 창문을 슬쩍 열었다가 곧바로 닫고 말았다.  

창문이 열림과 동시에 앰뷸런스와  경찰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불빛,

그리고 대낮처럼 달리는 낡은 자동차 소음과 먼지

더불어 낡은 도시가 뿜어내는 열기….

그때서야 창문들이 그렇게 꼭꼭 닫혀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매일 일을 마치고 종일 닫혀있던 공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냉동칸에서 통째로 빼낸 얼음을 욕조에 쏟아붓고 발을 담그면

내 발인지 얼음인지 헷갈리다 보면 몸의 열기도 빠져나가고 잠도 잘 수 있었다.

 

그렇게 여름은 두 번 지내는 동안에도 아무도 선풍기 구입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대신

룸메이트 없이 독방에서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근검 생활에 더욱 집념을 했었다. 

 

한 여름에 낸시를 만나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을 거쳐

근근이 여름까지 함께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낸시는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 철이면 내 기억 속에 나타난다.

 

궁핍했던 시절에 치열하게 살았던 기억 때문일까…

 

하루 종일 넓은 공간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방마다 한가하게 놓여 있는 TV를  내 마음대로 시청하고 있는 나처럼

낸시도 오버타임으로 열심히 번 돈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다.

 

거친 풍랑을 이긴 배만이 항구에 정착한다는 말처럼…

 

 

 

그러고 보니 1976년 여름날의 이야기다.

 

 

 

 

노래: It's only hurts for a little while/ Anne Murray

글, 사진[Pinterest]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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