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이 -
오랜만에 날 오이 몇 조각을 이마에 올려놓았다.
농사꾼이 시원한 바람을 만나듯 한 순간에 불현듯 잊고 있었던
우스운 장면이 하나 떠오른다.
여름 땡볕 사이로 미쳐 다 떼어내지 못한 오이 조각을 얼굴에 달고
대문을 향해 튀어가는 내 뒤로 벌겋게 화난 엄마의 얼굴이다.
넉넉한 것이라곤 맑은 공기와 동네 인심뿐 이였던 그 시절,
여름철에는 오이가 반찬의 주인공이었던 시절.
오이냉국, 오이무침, 오이짠지, 그리고 고추장, 된장에 찍어 먹는 날 오이는
식구들 식성 하고는 상관이 없이 무조건 여름 밥상을 차지하곤 했다.
특히 오이 한 개만 있으면 간단하게 냉국을 만들 수 있기에
아침, 저녁 밥상에 오이냉국은 단골 메뉴였던 것이다.
내 얼굴에 얹혀 있던 오이 조각도
바로 그날 저녁 반찬용으로 시장에서 사다 놓은 것이었다.
그날 나는
맨발로 남의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어야 했었다
- 우물가 -
지금처럼 집 집마다 냉장고와 목욕탕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시절,
여름이 되면 동네 우물 터는 냉장고와 목욕탕 이 두 가지 역할로 사용되는 장소였다.
그 당시 우리 집에도 양철 지붕 우물이 있었는데
우리 건물에 세 들어 살던
농약 집, 양복점 그리고 중국집 모든 식구들이 다 같이 그 우물을 사용했다.
동네 우물처럼 넓지는 않았지만
세든 식구들과 종업원들로 우물가는 특히 여름철이면 늘 북적거렸다.
시멘트로 넓은 가장자리를 만들어진 우물가에는
풋고추, 오이, 가지 그리고 가끔 토마토까지 커다란 고무 통에서
내 약 올리듯이 둥 둥 떠 있기도 했다.
더운 날씨가 계속되면
우물 속으로 늘어뜨려놓은 두레박이 냉장고 대용으로 사용을 하다 보니
각 집마다 두레박 줄 색으로 자기 것을 재치 있게 표를 해놓았다.
호기심, 장난기가 발동하면
물을 퍼 올리는 척하고 남의 밧줄을 당겨 올리면
우물 속에다 감춰놓았던 노란 참외, 동그란 수박이 "스윽"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순수한 심령이 심판대에 오르는 순간이 된 것이다.
먹기 전에는 꼭 우리 것 같았는데
먹고 나면 남의 것이 되곤 해서
도망치다 붙들려 혼이 나기도 했던 그 시절의 여름이었다.
이글거리던 태양이
낮과 이별을 하고 나면 우물가는 왁자지껄 시끄러워진다.
야단치는 소리, 자지러지는 아이들의 비명 소리와
한편에서는
갓 퍼 올린 우물로 등 짝을 쓸어낼 때마다 "아이코 써언하다"며익살 떠는 남자 소리에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보리쌀 씻은 물에 떠돌기도 했다.
모기장 안에서 뒤척거리던 내 눈가가 무거울 즈음이면
부드러운 어깨와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수줍은 물소리가 난다.
조신한 농약 집 아주머니의 마지막 차례 소리다.
이렇게 여름날의 하루는
우리 집 우물가에서 떠 돌다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서 정 -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 너머로 하늘이 늘 거기에 있듯,
내 기억의 창 너머에는 언제나 시골 풍경이 있고 그 속에는 엄마 있다.
'엄마' 그리고 '고향' 이 두 단어를 마른 소리로 부르는 사람이 있을까.
비누는 비빌 수록 거품이 일듯
어머니와 고향은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움은 방울이 되어 내 기억의 창에서 몽글 거리 곤 한다.
모든 사물은 추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 세월도 그 추억도 함께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좋은 세상을 만나
먹고 싶을 땐 냉장고에서 꺼내 먹고, 씻고 싶으면 찬물 더운물로 몸을 씻는다.
오늘처럼
냉장고 속에 할 일없이 돌아다니는 오이를 썰어 얼굴에 얹어놓고
샤워장에서 나오는 물소리를 들어도,
날 잡으러 오는 어머니의 낡은 고무신 벗겨지는 소리도,
시원해서 죽겠다고 질러대는 비명 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어머니 성난 얼굴 지울까 하고
이마에 올려놓았던 오이 두 조각을 눈 위에 내리니 어느새 두 뺨 위로
미지근한 오이 국물만 흘러내린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시골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축복이라는 걸
하지만 내 맘속 엔
고향과 추억은 뽑혀지지 않은 탄탄한 나무가 되어
언제나 내 영혼의 쉼터가 되어준다.
노래: Green Fields
글, 사진(펌)/작성
이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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