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폴더

내 탓

큐팁 2023. 3. 20. 08:08

카페인에 대한 예민한 반응 때문에

커피를 맛 대신 향으로 즐기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늘 상상 속에서 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의 향을 골고루 맡으며

모닥불 피워놓은 산장이나 해안가에서 

홀짝거리는 멋을 연출하는 만용으로 대신하곤 했다.

 

 

 

물방울이 빗줄기가 되어 창문을 두드리는 날이면

상상의 수치는 창틀 끝으로 치달아 올라

달달한 휴식에 빠지기도 한다.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셔도

꿀잠을 잔다고 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보인다면 

그만큼 향과 맛을 동시에 즐기지 못한 서러움일 수도 있다.

 

 

 

은퇴 준비 즈음에

집에서 직접 커피를 내려서 마실 용기가 생겼고

은퇴를 하자마자

아침을 맞이하면 제일 먼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는 일이

하루 노동의 보약처럼 강력한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예전에 상상 무대에서 커피잔을 장식품으로 들고

집안팎을 감싸고 있는 계절 분위기에 안겨서

은퇴생활이 주는 여유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하고 감사했는데...

 

 

 

그런데

언제부터 나는

 따끈한 커피 한잔을 비우기까지

커피잔이 오븐 속을 여러 차례 들락거린다는 것에

스스로 놀란다.

 

 

 

실내 커튼들을 열면서 한 모금

강아지 쓰다듬다 홀짝

아침준비 중에 눈앞에 보이는 커피 살짝

말린 빨래 걷어 개면서 홀짝

 

커피잔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계속 방랑한다.

 

이러고 있는 내가 정말 딱하다 

 

 

 

커피 한잔 후에 해도 되는 일

꼭 그 시간에 해야 하는 이유가 뭐니?

아니

아예 정리를 다하고 난 후 

 의자에 앉아서 한가하게 마셔도 되잖아?

 

눈에 어질러진 게 포착이 되는 즉시

바로 처리를 하고 나야 마음이 놓이는 나

잠시

미뤄놓고 나중까지 못견뎌서

자신을 채찍질해 대는 미련한 나

 

 

 

 

온갖 분위기 피워놓고

느긋하게 향과 맛을 한껏 만끽하던 상상 속에 있을 때가

차라리 멋졌다 싶으니 나를 향한 원망이 봇물처럼 터진다.

 

그럼에도

 다음 날 아침 들게 되는

가냘픈 커피잔 앞에서 심쿵대는 나

 

누구를 탓하랴...

 

 

 

 

노래: Aways Acoustic #1

글과 사진/작성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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