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에 잠이 든 엄마,
밤 11시 즈음이면 깨곤 했다.
그 당시는 자정이 되면
일반인들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하필이면 소방서와 파출소 바로 옆에서 살았던 우리는
밤마다 그 사이렌 소리에 기겁을 하기도 했지만 점점 익숙해지자
되레 안정 감을 얻기도 했다.
마흔에 남편 잃고 몇 년도 채 못돼 군대에서 휴가 나온 장남마저
강물에 익사하고 난 후로
약주 없이는 잠을 못 자는 습관이 생겼던 엄마.
큰 언니와 고향에서 ‘천재’로 소문난 언니는
큰 도시에서 결혼 생활과 학업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었다.
고향집에는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절대적인 남동생과
세상 재미를 잃은 엄마를 돌보며 보호자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나
그때 내 나이 13살.
다행히 아버지가 남겨둔 토지를 팔아 대로에 지은 상가에서
매달 나오는 렌트 비로 가족 생활비와 언니의 학비를 대신했는데
대부분의 집안일은 내 담당이었다.
해가 기울고 여기저기에서 전등 불빛 릴레이가 시작되면
언제 어디서 마셨을까..
방문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 오는 소주 냄새를 따라 간 내 시선 끝에는
영혼 뺏긴 몸체 하나 애달프게 구부려져 있었다.
겨우 몇 시간의 수면에서 깨어난 엄마의 눈동자와 걸음에서
갈증과 허기를 느낀 내 손에는 어느덧 노란 냄비가 들려져 있었다.
동네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자리 잡은 가락국수 집의 유리문을 두드리면
주인아저씨는
그 집 최연소 단골손님인 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
통 나무로 잘라 만든 커다란 도마 위에 올려진 시금치와
중 식도로 내려친 어묵 조각들이 펄펄 끊는 가락국수 국물 위에서
화사한 무늬로 휘 날리던 그 장면은
지금도 따끈한 가락국수 생각이 날 때마다 나타나곤 한다.
행여 국물이 흐를까 봐 냄비 바닥은 한쪽 팔 소매 위에
다른 손으로는 뚜껑을 누르고 한 발짝 씩 뗄 때마다
냄비 뚜껑 사이로 빠져나오는 가락국수 냄새가 발소리를 가속시켰다.
엄마가 다 마시고 난 가락국수 냄비 바닥에는
아직도 양념이 배어 있는 살찐 가락 국수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속이 한껏 시원해진 엄마는
나를 ‘심청’이라고 불러 주셨다.
*숙모님, 엄마, 고모님
사십에 과부 된 엄마,
장남마저 익사하자 술 없는 밤이 없었다.
그 곁에 겨우
남편 없는 허무와 아들 잃은 그 설움을 눈치채기 엔
너무 먼 거리에 있던 막내 동생과 나.
초 저녁잠이 아침까지 버티지 못해
늦은 밤 깨어나 허기 증에 목이 타들어 가고
셋째 딸이 들고나간 양은 냄비에 담겨 올
시원한 국물만 기다리던 엄마.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와 함께 후루룩 마시고
바닥에 깔린 가락국수를 넘겨주며
“고맙다 심청아”
그 이름 하나로 엄마와 나는 통했다.
시 - 셋째 딸의 이름 중에서 -
* clearwater.FL-에서 , 2019
글, 사진/작성
노래: 송창식의 창밖에는 비 오고요
이
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