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셋 중 막내로 자랐다.
부잣집 셋째 딸이면 얼마나 좋았겠나 마는
우리 집은 보통 중산층 이였기에
늘 언니들이 실컷 입다 내려주는 걸로 입고 자랐다.
그러다 보니
일 년에 새 옷 입는 설과 추석이야말로
내가 일 년 내내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던 명절이 되었던 것이다.
나이 차이가 많은 큰 언니는
마치 엄마처럼 느껴졌기에 자라면서 공유했던 것이 별로 없는데
그중에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공중목욕탕에 나를 볏겨 눕혀놓고
마치 생선비늘 벗기듯
돌로 문질러 대던 무서운 언니로만 기억한다.
대신
3살 터울인 작은 언니는 친구 같기도 해서 둘이서 자주 싸우기도 했다.
작은 언니는
국민학교 졸업할 때까지 공부를 제일 잘하는 우등생으로
학교와 동네에서 인정을 받아 집안에서는 '보배'라고 불렀는데
중학교 때부터 대도시에서 하숙생으로 지냈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나면 가을이란 계절이 슬슬 다가온다.
'가을' 하면
가을 운동회, 가을 소풍 생각과 함께
작은 언니랑 보냈던 초등학교 생활 중에
가장 억울하고 서럽던 날과 장면이 뭉게구름이 되어 떠올라온다.
그 당시에는
봄 소풍, 가을 소풍 이렇게 일 년에 두 번 소풍을 가는 게 계절 문화행사였다.
시골의 소풍장소란 주로 걸어서 갈 수 있는 낮은 산이나 들판 혹은 저수지 등이다.
*
일단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들이 다 모이면
낮은 학년부터 짝을 지어 출발하도록 되어있어 항상 언니보다 내가 먼저 출발을 했는데
문제는
김밥, 삶은 계란, 사탕, 사이다 등이 담긴 가방을 늘 언니가 챙겼다는 것이다.
거의 한 시간을 노래를 부르거나 옆짝과 수다를 떨면서 가는 동안
다들 가방 속에서 간식을 끄집어내어 먹으면서 가는데
나는 도착지까지 들판이나 하늘만 보고 걸었다.
어떨 땐 친구가 건네주는 사탕을 얻어먹을 때도 있지만
걷다가 신경질이 뻗치면 혹시 언니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자꾸 뒤를 돌아봐야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봤을 때마다 보이지 않은
언니를 찾느라 오히려 줄을 이탈하거나 뒤에 쳐지는 바람에
뒤쳐져버린 반 행렬을 따라 붙이기 위해 새 운동화가 먼지를 덮어쓰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소풍장소에 도착하면
그때서야 작은언니가 보이고 숨을 몰아 쉬면서 가방을 풀어헤치면
찢긴 사탕봉지에는 알 빠진 껍데기가 내 손가락에 달라붙고 김밥도 한쪽으로 쏠려져 있다.
화가 머리끄터머리까지 올랐어도
허기진 눈앞에 보이는 음식에게 분노가 해체가 되고 말았다.
어느 해는 상황이 더 나쁠 때도 있었다.
저학년과 고학년 장소를 나누게 되었다는 긴급 방송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진 나는
내 몫을 챙기기 위해 언니와 교실 뒤편에서
가방을 풀어놓고
정확하게 두 몫으로 나누는 일에 필사적이었다.
분배도중 다투느라 소풍을 못 갔다는 것은 아직까지 치명적인 흔적이 되고 있다.
그사이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흘러
돌멩이로 때를 밀던 호랑이언니도, 소풍가방을 독차지했던 작은 언니도
내 옆이 아닌
먼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인생사란 늘 엇박자라고 하듯
언제까지 같이 늙다가 함께 갈 것 같았던 두 언니를 보내고 나니
그 서러운 시절마저도 물기 맺힌 두 동공에 일렁대는
지난날의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가을이 보이면....
노래: 가을이라 가을바람/ 현재명
글, 사진/작성
이
슬